작품 전반

Elisabeth 조회 수 2106 추천 수 0 2010.07.31 15:19:16


1.


올렉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은 엘리자베트의 'Speigel der Seele', 영혼의 거울이라고.

굳이 우베-피아나 올렉-마이케 커플의 예를 들 것도 없다. 어떤 커플이 되어도 죽음과 엘리자베트는 서로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피아의 싸늘하고 울적하고 날카로운 시씨의 곁에 섰던 건 우베의 냉정하고 근엄하고 가혹한 절대자적 죽음이었다.

마이케의 (비뚤어진) 자기애가 넘치고 이기적인 시씨의 옆에는 올렉의 화려하고 난폭하고 만만찮게 이기적인 죽음이 있었다.

심지어는 '그' 칼뷁도 카린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티가 났었다.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2.


카린은 할도르가 올렉 죽음 마이너판 대신 자신의 죽음을 들고 나왔으면 정말로 잘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린의 시씨는 내향적이고, 속박에 저항하기 보다는 도피를 선택하는 소극적인 캐릭터였으니까. 할도르는 연출자에게 강요받은 올렉 컨셉을 들고 나왔지만 기본적으로 음습하고 내밀한 파충류 계열 죽음이었고.

여러 모로 아쉽다. 슈투트가르트 제작진은 대체 어째서 시씨에게는 자율성을 허락하고 다른 얼터-언더들에게는 메인의 컨셉을 답습할 것을 강요했는지 모르겠다. 슈투트가르트처럼 사람 많고 메인-메인 / 얼터-얼터 공연이 많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커플끼리 컨셉을 맞출 수 있게 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3.


루돌프나 프란츠 요제프는 상황이 나았다. 일단 프란츠 요제프가 많이 공기이기도 한데다, 이바가 워낙 성실하고 페터도 성실해서 할도르가 프란찌를 할 일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루돌프는 혁명황제 마틴과 성깔은 있는데 마음이 약해서 마지막에 망하는 로리가 나눠서 나왔고. 둘의 컨셉이 많이 다른데 죽음과는 잘 맞아떨어져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4.


그래서 피를 본 게 누구냐면 루이지 루케니가 되시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보다 더 큰 피해자가 루케니다.

슈투트가르트 공식 음반의 카스텐과 브루노의 루케니를 비교해보면 눈에서 눈물이 난다. 노래에 강세 넣고 엇박 넣는 부분까지 그대로 따왔어...둘이 캐릭터가 다른 건 알아볼 수 있어서 더 슬프다.

카스텐은 에센-슈투트가르트를 이어온 독일산 루케니의 시작이자 교본이다. 독일 루케니들은 그, 솔직하달까 밝은 부분이 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그리고 귀엽다. 이단 루케니 듣다가 들으면 더 그렇다. 92년 빈 초연에서 죽음이 밀던 광대 컨셉이 루케니에게 옮겨갔다는 느낌이다.

브루노는 빈 출신 루케니답게 날이 선 면이 있다. 광대짓 뒤에 잘못 건드리면 턱주가리가 나가겠구나, 이 자식 위험하다, 그런 느낌이 숨어있다. 슬쩍 어금니를 드러내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Milch나 Mein neues Sortiment 후반부에서 티가 확 난다. 처음 들었을 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런 브루노에게 무슨 짓이냐, 제작진.



5.


사실 루케니만 그런 건 아니고, 빈 출신은 죄다 독일보다 좀 더 똘끼가 넘치는 면이 있다. 무대 연출부터 그렇고. 이래저래 세기말적이라고 해야겠지. 92년부터 계속. 그래서 피아가 빈에서 다시 엘리자베트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캐릭터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피아의 엘리자베트는 92년 빈 초연의 엘리자베트였으니까. 네덜란드도 독일도 다 좋았지만 역시 따지자면 그 쪽이다. 대적자는 당신 자신뿐인 피아 마님의 청각적 흑역사기는 하지만서도.



6.


마이케의 엘리자베트는 독일이 어울린다. 네덜란드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빈의 무대에 마이케의 시씨는 너무 밝고 당당하다. 그래서 몰락이 더 가슴아프고 세상에 지치고 꺾인 모습이 와닿지만, 어쨌거나 마이케의 시씨에게는 빈 특유의 뒤틀림이 없다. 이건 애초에 독일에서 시작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마이케의 배우로서의 페르소나 영향이 더 크지 싶다.



7.


제일 좋아하는 죽음은 올렉의 죽음이다.

예전에 팬덤에 우스갯소리로 돌던 말이 있었는데, 각 파벌들은 다 자기와 맞는 죽음을 찾아갔다는 얘기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을 현실에 옮겨두면 올렉의 죽음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올렉의 죽음을 봤을 땐 객석에서 죽는 줄 알았다. 누군가의 연기를 보고 주마등을 본다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8.


아놔 쓰다 날렸어...

빈 연출은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죽음의 마차.

04년 Wenn ich tanzen will에서는 죽음의 정글짐으로 전락했지만, Die Schatten werden laenger에서 펼쳐서 침대로 쓰는 건무릎을 칠 정도로 멋진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리 쿠퍼가 연출을 잘하는 건 맞다. 종종 필요 이상으로 어두워서 그렇지.

Ich will dir nur sagen과 Wenn ich dein Speigel waer에서 써먹은 거울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사실 연출만 따지자면 빈 연출을 훨씬 좋아하는 것 같다. 의상은 네덜란드-독일. 별드레스 한정으로 핀란드.

특히 거울-액자 컨셉은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한다. 중요한 부분이라 세 번 반복했다. 멋진 모티브다. 어느 쪽도 실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히.



9.


그런 의미에서 프롤로그의 초상화는 참 멋진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시씨의 초상화는 죽은 자들의 오른쪽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왼쪽 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배우들 기준이니까...과거를 떠올릴 때는 시선이 오른쪽 위로 향한다고 했던가. 죽은 자들이 회상하는 장면이었지, 그거.

악취미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끝내주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결국 이뤄낸 것도 없이 자기 재능을 낭비하기만 하고 죽은 여자의 초상화, 그것도 가장 아름답고 어찌 보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시기(이자 몰락 직전)의 대외용 초상화를 걸어놓고 아무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아 외치는 모습이라니.

Kitsch!에서 루케니가 말하지. 그녀가 실제로 어땠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결국 엘리자베트는 액자 속의 이야기고 저마다 제가 생각하는 엘리자베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Ich will dir nur sagen도 초상화 속의 시씨가 걸어나오는 연출이잖아...일본 빼고.



10.


사실 최종 보스는 루케니.

저승에서 자기 최후 변론하려고 시작한 이야기기도 하고, 다들 시간축 따라서 움직이는데 저 혼자 오락가락 액자 안팎을 드나들면서 등장인물도 되고 나레이터도 되고 별거 다 하잖아. 죽은 자들을 깨운 것도 루케니고, 죽음 폐하를 불러낸 것도 어떻게 보면 루케니고.

출세했구나, 루이지 루케니(아나키스트, 사실 백수).



11.


Nichts, nichts, gar nichts 연출은 빈이 레알.

거기 가기까지의 연출은 독일판도 좋아하지만 역시 그 장면만 놓고 본다면 빈이 훨씬 마음에 든다.

공식 dvd가 참 못찍은 물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리 쿠퍼 연출이 어딜 가겠나. 해답은 광기요, 구원은 몰락 뿐이라며 절망하는 시씨가 저물어가는 제국의 황후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할 기세의 여제 폐하였다는 점이 조금 에러기는 했지만서도.



12.


독일판은 캐릭터와 스토리의 이해가 쉬워진 점은 좋은데, 너무 건전하고 덜 삐딱한 면이 있다.

이건 시씨가 실존했던 인물이라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빈은 실제로 그 언니가 살았던 곳이고, 92년 대본처럼 매니악한 개그 치면서 불친절하게 진행해도 다 알아먹지만 독일은 그게 아니잖아. 배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하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확실히 엄청나게 잘 다듬은 대본이기도 했지만 역시 좀 아쉽다.



13.


난 루돌프가 죽음에게 엘리자베트를 투영하고 있었다고 본다. 엘리자베트의 거울인 죽음에게 루돌프 자신이 보는 엘리자베트를 겹쳐서 보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어머니를 찾는 꼬마 루돌프에게 다가왔던 것은 죽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루돌프가 죽음과 엘리자베트를 어느 정도 동일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거 사실 정확했지. 죽음은 엘리자베트의 내면의 반영이었으니까.



14.


저 관계가 잘 드러나는 건 빈 연출이다. 나긋나긋하고 중성적인 (마테는 별로 안그랬지만) 움직임으로 침대에 앉는 죽음과 그 무릎에 매달리는 루돌프.

가끔 보면 시씨 대할 때 보다 루돌프 대하는 모습이 더 상냥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건 루돌프와는 달리 시씨가 죽음에게 상냥함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아니, 막판에 가서는 상냥함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루돌프와는 좀 얘기가 다르다. 기본적인 태도 문제라고 해야 할까. 시씨는 대립에 가깝고 루돌프는 의존이지.



15.


그림자 보면 오죽 매달릴 놈이 없었으면 저런 걸 찾아갔나 싶어서 불쌍하기도 한데, 문제는 내가 실제 루돌프가 엄청난 개자식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약쟁이 룸펜에 짝퉁 저널리스트...까지는 그렇다고 쳐. 바람 피우다가 마누라한테 병 옮기고 불임 만들어놓고 자살병으로 찌질대다가 10대 빠순이 하나 낚아서 동반자살한 놈을 어쩌면 좋니. 그것도 그 당시 사귀던 애인은 따로 있고 그쪽에는 무려 잘 지내라고 편지까지 남기셨단다. 딸까지 낳은 마누라는 가볍게 무시하고. 어이고...



16.


그거랑 별개로 루카스의 루돌프는 참 좋다.

루카스의 페르소나라고 해야겠는데, 섬약하고 예민하고 유한 캐릭터가 정말 잘 어울린다. 그런데 껍질 까보면 성깔도 제법 있고. 그림자에서 실시간으로 신경줄 톡톡 끊어지면서 뭐든 잡아보려고 버둥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거울송은 안될 거 알면서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들이대는 게 특히 좋았고.

그리고 뭣보다 비주얼이 참 좋죠. 제복이 어울리는 등빨의 남자가 의외로 찾기 어려워서. 앤디 비버는 너무 피골이 상접했고 샘돌프는...말을 말자. 우리 브로콜리 왕자.



17.


문득 생각난 일.

마틴은 과연 베를린 공연에서 프란츠 요제프를 했는가. 했으면 그야말로 그랜드 슬램 달성인데.

에센에서 루돌프/죽음 뛰고 슈투트가르트에서 루돌프/루케니 뛰고 베를린에서는 루돌프 뛰면서 프란츠 요제프 언더를 먹기는 했는데...과연 막 내리기 전에 해보기는 했을까.

솔직히 나라면 마틴 프란츠 요제프...안돼, 무리야, 이건 시킬 수 없어. 마틴의 혁명황제 루돌프는 정말 좋아하지만 마틴의 루케니와 죽음은 악보 위를 활공하는 왕년 일진 향기가 풍겼다. 폭주기관차 급이었어. 베를린 레미즈 시절 앙졸라도 그렇고, 하얗게 타오르는 혁명계열 캐릭터는 잘 어울리지만 '그' 프란츠 요제프에 마틴은 좀 불안하다. 실력 문제가 아니라 어울리고 아니고의 문제다. 목소리도 프란츠 요제프 감은 아니고.



18.


목소리로는 차라리 올렉이 프란츠 요제프...

에리는 생각을 멈추었다.


에리

2010.09.14 19:59:03

본문 수정만 하자니 날짜가 남지 않는 것이 신경쓰이는 관계로, 덧글로 전환.


19.

Nichts, nichts, gar nichts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Abgrund와 Seil과 추락/몰락에 대한 이야기였다.

니체는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진, 심연 위의 줄이라고 했다. 타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돌아보는 것도, 두려워 떨며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모두 위험한 일이라고 했지. 그 줄에서 심연을 내려다보며 뛰어내리고 싶다고 하던 시씨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Der Mensch ist ein Seil, geknüpft zwischen Tier und Übermensch - ein Seil über einem Abgrunde."

에리

2010.09.19 17:35:08

20.

Wie du - Wie du (Reprise)와 Nichts ist schwer - Boote in der Nacht는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한다.

moechte와 wollte 한 단어로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가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어요, 가 된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이야기다. 그 단어 하나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풀리는지를 생각한다면...전 그저 한 마리 충실한 쿤체의 노예일 뿐이죠.

Nichts ist Schwer와 Boote in der Nacht는...제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핥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곧 내 눈으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날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겠지요." 하던 가사가 그대로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더는 날 오해하지 않을 텐데..."가 됩니다. 쿤체를 찬양합시다. 그리고 리바이를 찬양합시다. 어쩜 저렇게 상반된 상황과 가사인데 둘 다 딱 들어맞는 곡을 쓸 수 있죠?

에리

2010.10.14 17:02:35

21.

긴말 필요 없다. 번안 누구냐.

시씨에게 중요한 건 '내가 나만의 것이다'라는 사실이다. 자유도 중요하지만 저게 먼저야.

곡 5/7을 난 자유를 원해, 하고 끝낼 상황이 아니라 이겁니다. 거기다 이거 음절 문제도 아니잖아.

난 자유를 원해 vs 나는 나만의 것. 전 일억 이천 후자. 저것만으로 부족하면 '난 내 것이니까'도 있습니다.

자~유! 라고 외치는 시씨라니, 지금 브레이브 하트 찍습니까? 죽음이 외칩니다. "Es ist doch Ihr Alptraum!"

에리

2010.10.14 17:08:29

22.

하나 더.

'새장 속 새처럼 살아온 지난 세월'이라니, 지금 열여섯이거든?

시씨는 자유롭게 살다가 새장에 갇힌 상황이지 내내 갇혀 살다가 자유선언 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에리

2010.10.14 17:15:33

23.

난 지킬의 '신이여 허락하소서!' 이상으로 심각한 대본 수준의 캐붕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데, 4년 전 올렉 팬덤에서 머리 모으고 했던 아마추어 번안이 훨씬 낫다.

에리

2010.10.14 17:31:40

24.

가사 관련으로 하나 더.

내가 여자는 항상 경어를 쓰고 남자는 항상 반말을 쓰는 식으로 번역하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 사이의 관계라는 게 있고, 상황이 있으니까.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하죠. 그리고 Sie와 du의 차이는 거리감이다. '당신'과 '너'라고 번역하긴 하지만 좀 어감이 달라. 할아버지를 du라고 하는데 그걸 너라고 번역할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는 나만의 것'에서 시씨가 너라고 외쳐대는 건 글러 먹었다, 이 말입니다.

시씨가 프란츠 요제프를 du라고 부르는 건 어디까지나 둘이 부부관계라서 그런 거다. 16살의 시씨가 오스트리아의 황제에게 너라고 말 까댈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냥 생각해봐도 8살 연상의 남자에게 저렇게 해대는 건 영 이상하잖아. 저 둘의 호칭은 당신-당신에 가깝다. 너-너는 시씨와 죽음.

에리

2010.10.16 22:14:44

25.

프롤로그 / 마지막 춤 / 이 몸이 춤추실 제 가사를 보았다.

죽자...

에리

2010.10.17 23:45:55

26.

내가 연기자로서 가장 공감하는 캐릭터는 시씨지만, 그와는 별개로 배우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액션에 대한 리액션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죽음이 시씨를 사랑했던 것은 시씨가 죽음을 사랑했기 때문에. 죽음이 루돌프에게 상냥했던 것은 루돌프가 죽음에게서 상냥함을 찾았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가 내게 기대하는 것을 돌려준다는 건 배우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에리

2010.12.06 12:29:58

27.

Totenklage에서 죽음이 시씨를 걷어찬 건 시씨가 죽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헛소리냐 싶겠지만 이건 중요하다. 대단히.


시씨가 실제로 죽음에게 한 말은 이거다.


이젠 내게 열어줘. 날 더는 기다리게 하지 마. 이미 충분히 괴로워하지 않았어?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저주받은 죽음아. 날 구원해줘!


결국, 그때 시씨가 바랐던 건 '구원'이지 죽음이 아니다. 살기 싫고 힘들어서 살지 않겠다고 했던 거지 죽고 싶어서 죽겠다고 했던 게 아니라는 소리다.

저 둘은 내가 죽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죽음을 원하기 때문에 죽음도 나를 원하는 한없이 삐딱한 관계라서. 고로 이 경우 죽음은 너를 원하지 않습니다.

에리

2011.05.26 12:06:44

28.

쿤체는 쿤체지만, 가끔은 원문보다 번역이 마음에 들 때가 있다. Niets, niets, echt niets 가사는 특히.


Ich steh auf dem Seil, und die Angst macht mich krank

(외줄 위에 선 나, 두려움에 쓰러질 듯한데)

dann schau ich nach unten, seh ich, nichts, nichts, gar nichts

(아래를 내려다본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Ik dans op het koord, en de angst maakt me ziek

(줄 위에서 춤추는 나, 두려움에 쓰러질 듯한데)

want kijk ik omlaag, dan zie ik, niets, niets, echt niets

(아래를 내려다본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원문은 '서 있다', 번역은 '춤춘다'. 

난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다. 시씨는 구속도 광대짓도 싫다고 계속 달아나던 사람이니까.

에리

2011.09.17 14:27:28

29.

나 솔직히 Nichts 정말 좋아한다. 나는 나만의 것보다 더 좋아한다.

하지만 빈 초연 당시에 썼던 축약판도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아무것도 없는 삶에 무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꾸미지 않아도 되는 너를 정말 질투한다고 하는 시씨가 굉장히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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