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h will dir nur sagen이나 Wenn ich tanzen will에서 죽음이 얼굴을 내민 건 시씨가 뼛속까지 허무주의에 찌들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승리를 거둔 순간에 죽음이 나타났다는 건 참 흥미로운 일이다. 무언가를 이뤄내고 성취감에 젖는 대신, 목표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지는 몹쓸 근성이 있다는 뜻이거든. 이뤄낸 일이나 얻어낸 것에 제대로 기뻐하지 못한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남아 있는 건 하강이다.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는 내리막길.
그런 사람이 보고 달리던 목표를 잃으면 대신 보이는 건 뭐냐, 자기 내면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Wenn ich tanzen will에서 죽음이 유독 더 강하게 접근하는 건 그만큼 더 죽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큰일을 이뤄내면 상실감도 더 크지.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만큼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새삼 느낀 건데, 시씨도 그렇고 형사님도 그렇고 이입하고 성격 분석하려고 들면 내 정신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 같아. 언제 어디서나 글러 먹은 최애캐를 자랑합니다. 특히 시씨는 상태 나쁠 때 파면 정말 죽고 싶어져요. 곤란하다.
죽음이 하던 대사 중에서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역시 Prolog의 ich habe sie geliebt.
왜 과거형이지? 죽어서? 하지만 죽음이잖아? 하면서 제법 오래도록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객체로서의 시씨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Der Schleier faellt에서도 나오잖아, 나는 너와 함께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가겠다고. 시씨가 루케니에게 찔린 후에 상복을 스스로 벗어 던지는 것도, 죽음에게 달려가서 안기는 것도 모두 그...뭐라고 하지. 자의든 타의든 떨쳐내지 못했던 걸 모두 내버리고 해방되는 것 같아서 좋아했었다. 문제는 이게 자기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 정도? 자유가 있으면 뭘 하나. 자유를 누릴 내가 없는데.
죽음과의 포옹은 시씨에게 구원이자 해방이고 가장 큰 패배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 언니를 어떻게 까겠어. 무대 위의 시씨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마님은 정말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우셨는걸.
우베의 죽음에서는 젖은 흙과 묘비 냄새가 난다.
살갗이 아니라 대리석 만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아. 그냥 대리석 말고, 이슬에 젖은 묘비나 조각상 그런 거. 가늠할 수도 없고 감히 대적할 수도 없는 압도적이고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인간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말이 좀 이상하기는 한데, 한없이 자연적인 죽음 같다.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네. 어떤 식으로 죽어도 결국 곁에 서 있을 건 우베일 것 같은 느낌이다. 아흔 살 넘겨서 침대에서 죽어도 머리맡에 앉아 있을 건 우베. 등산하러 갔다가 낙석에 깔려 죽어도 내려다보고 있을 건 우베. 홍수라거나 지진이라거나 페스트라거나 그런 재해로 죽으면 쓸고 지나간 자리를 걷고 있을 것 같은 것도 우베. 뭐 이런 식으로...
신도 악마도 없고 있는 건 죽음뿐이더라,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죽음도 역시 우베. Dans Macabre도 우베...라고 하기에는 빈 초연 우베 컨셉이 딱 그거라서. 취향 불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석적인 죽음이다.
물론 에센판에서는 작품이 로맨스 물이 된 관계로 좀 덜하셨습니다.
올렉의 죽음은 피비린내가 난다. 화약 냄새랑. 쇠붙이 냄새도 나고.
인간의 악의가 부른 죽음 곁에는 항상 저분이 서 계십니다,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 전장은 물론이고, 어떤 방식이든 학살 현장에는 반드시 올렉의 죽음이 있을 것 같다. 한쪽 입꼬리만 쭉 올리고 비웃는 모습으로.
우베가 신도 악마도 없다는 느낌이면 올렉의 죽음은 악마의 존재를 믿게 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말하길, 지옥은 비어 있고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고 했지.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들은 죽음이 열두 명인데,(다카라즈카 제외. 그건 황천의 제왕 토-토 각하지 죽음이 아니다...)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죽음을 고르자면 올렉. 가장 개자식인 죽음도 올렉.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죽음과 가장 흡사한 것도 올렉이고 내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죽음도 올렉이다.
올렉의 죽음은 화려하고 난폭하고 이기적이고 잔혹한 미친놈이라서 좋다. 내 죽음을 고르라면 역시 올렉인 것 같아. 그 '내 죽음'이 나한테 붙어 있을 죽음인지 내가 생각하는 죽음인지 다른 무언가의 번데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끔찍하고 무서운데 매력적이다. 달아나고 싶으면서도 결국 팔을 뻗게 돼. 죽음 취향이 나빠서 면목없다.
한참 엘리자베트 팬덤에서 놀던 시절에는 우리 오라버니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료가 너무 없어서 우크라이나 역사를 파다 보니까 좀...너무 피바다더라고. 역사책 읽다 보니까 입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핍박과 침략과 학살과 학살에 학살 더. 1932-33년의 Holomodor는 생존자 수기 찾아서 읽어봤는데 그냥 아...하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더라.
개인적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대사는 1막 마지막 대사다.
오늘 눈에 비치는 것도 내일이면 과거가 되어버리리. 너의 눈길이 어디로 달아나더라도 시간은 나의 편이다. 하는 부분.
우베의 죽음은 저 대사를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피할 수 없고, 피할 생각도 들지 않는 그런 일로 느끼게 만든다.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누구나 겪고 사는 그런 것으로.
그건 아마 우베의 죽음이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은 선고다. 싫고 좋고를 따지기 이전에 굴복하게 된다. 내 죽음이 우베였다면 나는 죽음과 춤을 추지 못한다. 그냥 얌전히 손잡고 따라갈걸.
8월 10일의 올렉은 저 대사를 아주, 대단히, 정말로 소름끼치게 들리게 쳤다. 아니라면 내가 손수 그렇게 만들어주지. 하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귀를 틀어막아도 어딘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뇌를 진탕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죽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건 나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디서 뭘 보든, 뭘 하든, 그 뒤에 항상 죽음이 서 있을 것 같았다. 한 꺼풀만 벗겨도 바로 죽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무서워서.
내가 내 죽음이 올렉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것 때문이다. 무서워서. 매혹적이지만, 꺼리고 피할 생각이 든다. 이 죽음이라면 함께 탱고를 추면서 인생을 달려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예스퍼의 죽음은 아주 개인적이다. 서늘하고 조금 축축하게 달라붙는 안개 같은 죽음이었다. 아니면 뱀.
우베가 자연사요 올렉이 재앙이라면, 예스퍼의 죽음은 암살당하는 느낌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슥하고 찔리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병. 아니, 병보다는 독살이다. 바닥에 악의가 깔려 있다. 그것도 단박에 죽는 게 아니라, 서서히 지쳐가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죽어 있더라-하는 느낌.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내게는 모쪼록 붙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죽음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건 살아가면서 함께 달리고 내 모든 걸 던져서 맞서 싸우다가 딱 마지막 순간에 완전히 박살 난 채로 굴복할 수 있는 죽음이지, 점점 무기력해지다가 결국 항복하게 되는 그런 죽음이 아니다.
눈앞의 남자를 한 품 가득히 그러안았다. 그의 몸은 예상 외로 단단했고, 꼭 생각했던 것만큼 차가웠다. 무게감이 없는 몸뚱이에 매달려 눈을 감았다. 전쟁과 굶주림의 냄새가 났다. 둘 다 자신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 생소함에 얼굴을 묻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달콤한 나른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영원이 흐르고 있었다.
"데리러 왔어."
남자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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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죽음앓이 하다가...트위터에 했던 투척 또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죽음은 내가 죽음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음을 사랑하면 죽음도 나를 사랑하고...뭐 그런 거. 난 죽음을 난폭하고 무섭고 그러면서도 아주 매혹적인 무언가로 보고 있으니까, 내 죽음도 당연히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겠지.
더해서 살기 싫어서 죽음을 부른다 -> 거절한다. / 정말 죽고 싶다 -> 죽자고 꼬시러 온다.
어떤 쪽으로 가져올까...하다가 이쪽으로.
올렉 죽음이 성질 더러운 거야 내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아폴로 테아터 건물도 아는 사실이지만 새삼 쓰고 싶었다. 올렉 죽음은 정말 진짜 끝내주게 성질 더럽다. 성격 나쁘다. 내가 그걸 정말 뼈저리게 느꼈던 건 8월 10일 공연 An Deck der sinkenden Welt에서 죽음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원래 죽음이 거...깝죽대는 장면이긴 하지만서도, 그렇게까지 사람 속을 뒤엎는 죽음은 처음 봤다 -_);;; 얘기를 들은 모 님 말씀하시길, 미카숑 프란츠라면 울었을 것 같다고 하시던데 나도 그 감상 찬성일세. 저-기 위에서 '이봐, 난 너를 비웃으러 왔어. 설마 그것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겠지?'하는 느낌으로 사람 속을 부드다다다닥 긁고 있는데 안 서럽겠나.
특히 "당신의 가라앉는 배입니다, 폐하." 부분이 갑이었다. 전지전능하시며 세상만큼 나이를 먹었고 세상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실 죽음 폐하께서 인간에게 폐하는 무슨. 그 직후에 "이런 멍ㅋ청한ㅋ자식ㅋ을ㅋ봤나ㅋ"하고 자막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삐딱하게 나한테 묻지 말라고 하는 거 붙은 시점에서 크리티컬이다.
원래 대본에는 Der Tod ist jung, attraktiv und erotisch. Er gleicht einem androgynen Popstar und ähnelt dem jungen Heinrich Heine.이라고 나와 있지.
올렉 죽음은 젊고 매력적이며 에로틱...까지는 맞는데, 양성적이지도 않고(오히려 낯뜨거울 정도로 노골적인 남성성에 가깝지) 팝스터라기보단 렛츠롹!!! 분위기고 하인리히 하이네와는 전혀 안 닮았다...역대 죽음 중에 젊은 시절 우리 마이스터와 닮은 건 초연 우베밖에 없었고 우베도 사실 헤어스타일 버프가 컸어. 마이스터보다는 보위횽!!!에 가까운 느낌도 있고.
사실 미디어가 일정 이상 남은 역대 죽음 중에 양성적인 것도 우베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건 배우 탓이라기보다 연출 탓이 큰데, 에센 대본 보면 androgynen Popstar는 남아 있으되 연출이 전반적으로 죽음과 시씨 사이의 로맨스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 에센 연출은 Stage Entertainment 달고서 네덜란드 연출을 거의 그대로 이은 쪽이니까 아마 오스트리아->네덜란드 과정 사이 어디에서 생긴 변화일 텐데...불친절해서 사전 지식 없으면 반의 반도 즐길 수 없는 빈 대본 그대로 다른 나라에 가져가기 곤란했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빈을 떠나면서 죽음(들)은 Mayerlingwalzer의 베체라 드레스를 벗어던졌고, 루돌프의 침대에서 내려가(Die Schatten werden länger) 시씨의 침대에 올라탔다(Elisabeth, mach auf). 루돌프의 침대에 앉아서 기다리는 죽음, 그러니까 의지할 곳이 없는 루돌프가 무릎팍에 매달릴 어머니의 대체물에서 벗어나면서 시씨를 침대에서 유혹하는 죽음이 되었지. 빈 연출에선 멀쩡하게 소파에 앉아서 나오던 죽음이 다른 판본에서는 침대에서 타이타닉을 시전하고 침대에 눕히기까지 한다. 바로 차이지만. Geh-----------------------!하고.
그리고 Der Schleier fällt에서는 공주님 안기를 시전하죠. 빈에서는 죽음의 천사들에게 넘겨주고 루케니랑 눈과 눈이 마주쳤던 순간 시전하는데.
이래저래 죽음 곡이 좀 더 화려해지고(특히 Der letzte Tanz 편곡) 템포도 빨라진 건 저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에센 넘어가면서 화려해지고 슈투트가르트 가면서 죽음이 공작새가 되었어요. 내 취향이야 그쪽이지만.
다만 아직도 루돌프 침대에 올라가면서 시씨 침대에 못 올라가는 빈 판본 죽음이 노골적으로 남성성에 기울어진 건 참 아쉽다고 생각한다. 베체라 드레스도 입는데 말이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우선은 그냥 죽음에 대해서.
죽음은 내면의 반영이다. 오라버니 자랑을 하는 빠순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좀 들지만, 올렉의 'Spiegel der Seele' 발언은 정말 정확했다고 생각한다.
작중에서 죽음이 등장한 것은 시씨가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아니면 시씨가 달아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첫 만남은 시씨가 실제로 죽을 뻔했을 때였지만 그건 예외로 치고. 결국 시씨가 죽음을 불러낸 거나 마찬가지다.
죽음만한 도피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