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설정만 빌려와서.
아마 어딘가에 21권 이후 내용도 포함.
Der Tod ist jung, attraktiv und erotisch. Er gleicht einem androgynen Popstar und ähnelt dem jungen Heinrich Heine.
죽음은 젊고, 매력적이며, 에로틱하다. 그는 양성적인 팝스타 같으며 젊은 시절의 하인리히 하이네와 닮았다.
- Elisabeth, Prolog. 죽음의 등장 장면.
왜 하인리히 하이네냐면, 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이신 엘리자베트께서 하인리히 하이네의 열렬한 빠순이셨기 때문에.
고로 전 죽음은 내면의 반영이라는 해석에 한 표.
그리고 사사즈카 에이시에게 붙은 죽음은 사사즈카 에이시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20대 중후반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워낙 매직☆동안인 양반이라서 대학생 시절과 별 차이는 없겠지. 그냥 경감님 외모라고 생각하면 되지 싶다.
복장은 검정. 검푸른 색도 좋고. 독일판 죽음 의상을 엄청나게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거 하나하나 뜯어보면 폭탄인 부분이 워낙 많아서...박쥐 칼라라거나 프릴이라거나 배바지라거나 짧은 조끼라거나.
장갑은 디폴트. 쓰리피스 정장에 타이는 더블 크로스 노트로 매고 장갑 끼고 나와주시면 내가 죽을 것 같다. 자켓 없이 코트 입고 나와도 환장...캐주얼도 좋고. 어떤 쪽이든 색은 검정.
공백의 1년, 특히 남미에서 보낸 시간은 죽음이 함께 있던 시간이 함께 있지 않은 시간보다 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작은...징하게 악몽을 꾸고 일어났더니, 죽음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도가 아닐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기절하게 놀랐을 테고,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앉아 있었겠지. 잔뜩 긴장하고 뭐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으려 했더니 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감상은 내가 드디어 완전히 미쳤나 보다.
그 이후에도 불쑥불쑥 나타나고는 했겠지. 특히 새벽에 땀에 절어서 깨면 백이면 백 그가 옆에 앉아 있었을 테고.
먼저 말을 걸었을 건 아마도 죽음. 방금 꿨던 꿈이라거나 하고 있던 생각 같은, 자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저건 나다, 난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누군가가 죽음을 알아차리면 혼란에 빠진다. 내가 환각을 보는 게 아니었다고?
루돌프도 그렇고, An Deck der sinkenden Welt에서도 그렇고, 죽음은 원하기만 하면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지.
일단 충격이 지나가면 당신, 정말로 있는 거였느냐고 물어보겠지. 죽음은 애매하게 웃으면서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 않을 테고. 왜, 환상이라고 생각했어? 하고 반문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사사즈카 에이시는 생각을 포기했다.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놈을 어쩌겠어.
귀국 후에도 한동안은 남미에서만큼 얼굴을 자주 비췄지 싶다. 그야말로 죽음과 함께 하는 즐거운 무직 기간...정신건강이 살해당하는 소리가 들린다.
공채는 1년에 세 번 있고, 대졸이니까 세 번 다 응시는 가능. 귀국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이 1월/4월/9월에 있고 접수가 한 달쯤 전이니까 별로 상관은 없겠지. 2차 시험은 1차 시험 한 달 후. 최종 결과는 2차 시험을 치고 두 달 후에 온다니까 못해도 4개월, 길면 반년 이상은 걸리겠다.
배속까지 얼마가 걸릴지는 잘 모르겠다. 합격하면 일단 반 년간 경찰학교에서 굴러야 하고, 그다음에 배속이 된다는데 무려 수사1과에 가 있잖아. 수사1과는 관할 경찰서 형사과에서 전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야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기숙사에서의 반년+수사1과 가기 전까지의 기간에는 죽음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회는 수사1과에서 나간 첫 현장.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피해자 옆에 죽치고 있는 죽음.
잠시 굳었겠지. 시체를 보고 그랬겠거니 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죠. 시체가 아니라 시체 옆의 남자를 보고 굳었습니다.
눈이 마주치면 아주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고 그대로 사라져버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퇴근했더니 죽음이 소파를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사도 해주시고.
현장에 나가면 세 번에 한 번꼴로 마주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왔다갔다했을 테고. 예외는 4월 30일. 매년 4월 30일은 죽음과 함께.
붉은 상자와 얽힌 날이면 어김없이 죽음이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은 하지 않고 계속 옆에 앉아만 있었을 것 같다. 당연히 웃고 있겠지. 형사는 잠 못 이루고.
비번인 날에 집에서 서류 보고 있는데 죽음이 TV를 켜주는 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붉은 상자 또 나왔다고.
죽음 폐하가 납셔서 손수 뉴스를 틀어주시다니 이건 뭐 하는 사치래. 어쨌거나 한없이 기분이 꽁깃해졌을 듯.
TV를 끄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지만 잘 읽히지 않았다. 죽음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옆에 앉아서 왜 껐느냐고, 관심이 없느냐고 신경을 살살 긁어대는 말을 해댔다. 아주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그 '죽고 싶은 마음'이 멋대로 튀어나와서 저 의자에 앉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마음을 타자화할 수 있다. 내가 죽음과 대면한 순간, 그 마음은 내가 품은 것이 아니라 죽고 싶은 마음을 형상화한 무언가가 되는 거다.
'저것'이 내 안에 있었다면 그건 암 덩어리와 같아서, 어느 순간엔가 내 몸을 점령하고 날 집어삼키고 죽음에 이르게 할 거다. 하지만 '저것'이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저것'과의 거리는 내가 살 수 있는 힘이 된다. 경계하고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언젠가 마주하고 끌어안게 되겠지만, 아직은 괜찮아.
시작은 과거 엘리자베트 팬덤에서 떠돌던 1인 1죽음 배정제.
의인화된 죽음의 개념으로.